내가 그의 작품을 만난 건 퐁피두센터의 한 특별전시전에서였다. 원래는 디지털과 예술의 미래라는 테마 때문에 그다지 큰 기대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양아버지를 위해 돈이 될 만한 작품들을 찾고 있었고, 때문에 복제가 가능한 디지털 작품들은 내 수집 대상에서 제외되기 일쑤였다. 즉 내가 그 전시전에 간 건 순전히 지적 호기심에서였다는 말이다. 웬일로...
어느 날 광대가 왕에게 말했다. “왕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굶어 죽을 걱정도, 얼어 죽을 걱정도 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자 왕은 광대를 불러 이렇게 말 했다. “그럼 잠깐만 너와 나의 자리를 바꾸어 보자.” 그리고 두 사람은 자리를 바꾸었다. 광대는 높은 왕좌에 앉으니 참으로 좋았다. 그곳에서는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잘 보였다. 그러다 문득 위를...
“자네는 어떻게 처음 칼을 들었나?” “나? 맞고 싶지 않아 칼을 들었고, 죽고 싶지 않아 그걸 휘둘렀지. 그러다보니 여기까지 와 버렸어. 자네는?” “난 그냥 이렇게 되었네. 내 아버지도, 아버지의 아버지도, 모두 이걸로 입신양명했으니까.” “난 살기위해 이걸 들고 있네. 자네는 무얼 위해 드는가?” “칼이라. 내게 이건 수단이지. 더 큰 힘을 얻기 위한...
내가 ROTC 동기들에게 연락을 돌린 건 종전 1주년 기념식 즈음이었다. 비록 쪽방에서 모아둔 월급이나 까먹고 있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얼굴은 한번 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건 경식이었다. 그의 아버지가 대령이라 우리끼리 말똥 수저라고 불렀는데, 나중에 장포대였던 그의 아버지가 별을 달자 별수저가 된 녀석이었다. 나랑은 ...
그날 실연한 K에게 J가 술을 샀다. 두 사람은 나이도 같았고, 군대도 비슷한 시기에 다녀와 복학하면서 우연히 기숙사 룸메이트가 되었다. 컴퓨터 공학과 사회학이라는 전혀 다른 전공을 가졌으면서도 결국 공무원이 답이라는 같은 결론을 가진 20대 청년들이었다. 초장부터 위장에 싸구려 소주를 쏟아 부은 K는 벌써 혀가 꼬여있었다. 그는 무감각해진 뱃속에 안주를 ...
왕은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었다. 꺼질 듯한 호흡을 가까스로 이어가면서, 그는 자신의 지난날들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다. 엄했던 부왕과 일찍 죽은 모친, 그리고 야심 가득한 배다른 형제들.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어린 시절이었다. 그때 그에겐 유모가 들려주던 옛 이야기만이 마음 놓고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는 특히 거인 이야기를 좋아했다...
1.0 첫째가 태어나고 분만실을 나왔을 때 내게 가장 먼저 연락을 한 것은 광고 회사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줄 수 있는 혜택들을 줄줄이 나열했고, 기간 한정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물론 그놈의 한정된 기간은 한 번도 끊어지지 않았다.)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새 생명이 태어난 걸 어떻게 알아차렸을까. 의사가 리베이트라도 받은 걸까 했다가, 아예 병원 측...
도시의 하늘은 광고 속의 CG보다 더 청명했다. 널찍한 도로 위에 차선은 방금 그은 것 마냥 깨끗한 흰색이었고, 길 따라 늘어선 가로수들은 푸르고 싱싱했다. 차들은 출근시간대임에도 정체 없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이렇게 너무나 완벽한, 이상적인 도시의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옛날 사람들이 상상한 미래의 도시는 우중충한 날씨와 마천루의 ...
밤이 깊을수록 기방의 불빛은 더욱 밝아졌다. 낮게 맞닿은 처마를 따라 풍악 소리가 이어지며 정적은 머물 곳이 없었다. 인경소리가 멀어진지 오래였지만 기방에 시비를 걸 관원이 있을 리 만무했다. 홍 별감은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비싼 염료를 듬뿍 쓴 홍의는 흘린 술로 흥건하게 젖었고, 초립은 한쪽에 던져둔 채였다. 거푸 술을 들이 붓는 그를 아무도 말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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